이마누엘 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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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마누엘 칸트는 1724년 프로이센의 쾨니히스베르크(현재 칼리닌그라드)에서 태어난 철학자이다. 경건주의적 환경에서 성장하며, 1770년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 철학 교수가 된 후, 평생 이 도시를 벗어나지 않고 연구에 매진했다. 그는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 등 비판 철학을 통해 인식론, 윤리학, 미학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혁신적인 사상을 제시하며 서양 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칸트는 인간의 이성과 자율성을 강조하며, 정언명령과 같은 윤리적 원칙을 제시했으며, 역사 철학, 정치 철학 분야에서도 공화주의와 국제 평화를 옹호했다. 1804년 사망했으며, 그의 철학은 독일 관념론, 실증주의, 현상학, 실존주의 등 다양한 학파에 영향을 미쳤지만, 인종차별적 견해를 보였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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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누엘 칸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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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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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임마누엘 칸트 |
원어 이름 | Immanuel Kant |
출생일 | 1724년 4월 22일 |
출생지 | 쾨니히스베르크, 프로이센 왕국 |
사망일 | 1804년 2월 12일 |
사망지 | 쾨니히스베르크, 동프로이센, 프로이센 왕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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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 (BA; MA, 1755; PhD, 1755; PhD, 1770) |
활동 기관 |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 |
학위 논문 1 제목 | 형이상학적 인식의 첫 번째 원리에 대한 새로운 해명 |
학위 논문 1 URL | 형이상학적 인식의 첫 번째 원리에 대한 새로운 해명 |
학위 논문 1 년도 | 1755년 9월 |
학위 논문 2 제목 | 감각 세계와 지성 세계의 형식과 원리에 관하여 |
학위 논문 2 URL | 감각 세계와 지성 세계의 형식과 원리에 관하여 |
학위 논문 2 년도 | 1770년 8월 |
철학적 배경 | |
지역 | 서양 철학 |
시대 | 계몽주의 시대 |
주요 관심사 | 미학 인식론 윤리학 형이상학 체계 철학 |
학파 및 전통 | 계몽주의 철학 칸트주의 |
기타 학파 | 고전적 자유주의 경험적 실재론 독일 관념론 자유주의적 자연주의 초월적 관념론 |
주요 사상 | 미적-목적론적 판단 분석-종합 구분 정언 및 가언 명령 범주 비판 철학 철학에서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무관심적 쾌감 경험적 실재론 칸트의 앙티노미 칸트 윤리학 목적의 왕국 성운 가설 초월적 스키마 이론 대 실천 철학 초월적 관념론 초월적 주체 오성-이성 구분 |
영향 | |
스승 | 마르틴 크누첸 요한 고트프리트 테스케 (문학 석사 지도 교수) 콘라트 고틀리프 마르크바르트 |
제자 | 야코프 지기스문트 베크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 카를 레온하르트 라인홀트 (서신 교환) |
영향 받은 사상가 | 크리스티안 볼프 알렉산더 고틀리프 바움가르텐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섹스투스 엠피리쿠스 데이비드 흄 애덤 스미스 르네 데카르트 바뤼흐 스피노자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 마르틴 크누첸 존 로크 장자크 루소 아이작 뉴턴 요한 니콜라우스 테텐스 에마누엘 스베덴보리 에우클레이데스 에피쿠로스 |
영향을 준 사상가 | 사실상 이후의 서양 철학 전체 특히, 칸트주의 신칸트학파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 프리드리히 셸링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야코비 야코프 지기스문트 베크 크리스티안 야코프 클라우스 잘로몬 마이몬 카를 레온하르트 라인홀트 프리드리히 슈레겔 아우구스트 빌헬름 슈레겔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프리드리히 니체 찰스 샌더스 퍼스 에드문트 후설 마르틴 하이데거 에른스트 카시러 위르겐 하버마스 존 롤스 노엄 촘스키 장 피아제 쇠렌 키르케고르 테오도어 아도르노 다비트 힐베르트 미셸 푸코 막스 베버 피터 프레데릭 스트로슨 레오 슈트라우스 존 맥도웰 게오르크 지멜 호세 아수르멘디 폴 가이어 T. K. Seung 토머스 포게 무쭝산 로버트 노직 야에 골로소프케르 자크 라캉 알렌카 주판치치 나카지마 요시미치 하니야 유타카 히로마츠 와타루 무라카미 하루키 가라타니 고진 |
2. 생애
1724년 프로이센의 쾨니히스베르크(현재 러시아 칼리닌그라드)에서 태어난 칸트는 평생 대부분을 그곳에서 보냈다. 어린 시절 경건주의 가정에서 자란 칸트는 엄격한 교육을 받았으며, 1732년 프리드릭스 김나지움, 1740년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에서 철학과 수학을 공부했다. 마르틴 크누첸에게 논리학과 수학을 배우며 아이작 뉴턴의 물리학에 매료되었다.
1746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학업을 중단하고 가정교사 생활을 하며 철학 연구를 이어갔다. 1755년 《일반자연사와 천체이론》으로 박사 학위, 《형이상학적 인식의 으뜸가는 명제의 새로운 해명》으로 강의 자격을 얻었다. 대학에서 일반논리학, 물리학, 자연법, 자연신학, 윤리학 등 다양한 주제를 강의했다. 1756년 크누첸의 후임 교수직을 얻으려 했으나 실패했고, 1764년 문학 교수직도 거절하며 철학 교수직을 갈망했다. 1766년 왕립도서관 사서로 일하다 1770년 쾨니히스베르크 대학 철학 교수가 되었고, 이때 발표한 교수 취임 논문은 비판철학의 시작을 알렸다.
10여 년의 철학적 침묵기 후, 1780년대에 《순수이성비판》(1781, 1787), 《실천이성비판》(1788), 《판단력비판》(1790) 등 주요 저서를 발표하며 비판철학의 정수를 선보였다. 1786-8년에는 쾨니히스베르크 대학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칸트는 평생 쾨니히스베르크를 떠나지 않았고, 규칙적인 생활을 했다. 그의 산책 시간은 매우 정확하여 이웃들이 시계를 맞출 정도였다. 루소의 에밀에 몰두해 산책을 잊은 일화는 유명하다. 칸트는 루소를 통해 인간 존중을 배웠다고 언급했다.[218]
1792년 논문 출판과 검열 문제로 학부 관리처와 갈등을 겪기도 했다. 평생 독신으로 커피와 담배를 즐겼던 칸트는 1804년 2월 12일 80세로 생을 마감하며 "그것으로 좋다(Es ist gut)"라는 말을 남겼다.[262]
2. 1. 유년 시절과 교육
1724년 프로이센의 상업도시 쾨니히스베르크(현재의 러시아 칼리닌그라드)에서 수공업자인 아버지 요한 게오르크 칸트(Johann Georg Kantde, 1682–1746)와 어머니 아나 레기나 칸트(Anna Regina Kantde, Reuterde, 1697–1737)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11명의 자녀 가운데 넷째였으며, 그중 6명만이 성인이 되었다.[15] 칸트는 '에마누엘'(Emanuel)이란 세례명을 받았으나, 히브리어를 공부하고서 '이마누엘'(Immanuel: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로 바꾸었다.[255][256]칸트의 아버지 요한 게오르크 칸트는 프로이센 최북동부 도시(현재 클라이페다, 리투아니아)였던 메멜 출신의 독일 마구 제작자였다. 칸트 가문은 칸트바이냐이(Kantvainiai) 마을(독일어: ''Kantwaggen'' – 현재 프리에쿨레의 일부)에서 유래했고 쿠르셰니에키(Kursenieki) 출신일 가능성이 있다.[13][14] 그의 어머니는 뉘른베르크에서 태어났다.[258] 칸트의 할아버지는 스코틀랜드에서 동프로이센으로 이주한 사람이었으며, 그의 아버지는 여전히 가족의 성을 영어식("Cant")으로 적곤 했다.[259]
어렸을 때 칸트는 돋보이지는 않았으나 성실한 학생이었다. 그는 경건주의를 따르는 가정에서 성장했으며, 기독교 경건주의는 종교적인 헌신과 겸손함 그리고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것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칸트가 받은 교육은 수학과 과학보다 라틴어와 종교 교육이었고, 엄격하고 가혹한 훈련을 강조한 것이었다.[260]
칸트는 1732년 어머니와 친분이 있던 신학자 슐츠가 지도하던 사학교 프리드릭스 김나지움에 입학하고 1740년에 졸업했다. 같은 해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에 입학하여 철학과 수학을 공부했는데, 특히 마르틴 크누첸(Martin Knutzen)에게 논리학과 수학을 지도받았다. 이후 자연과학에 관심을 두었고 아이작 뉴턴의 물리학에 매료되었다.[261]
후대 전기 작가 기록에 의하면, 칸트는 1746년 《활력의 진정한 측정에 관한 사상》(''Gedanken von der wahren Schätzung der lebendigen Kräfte'')이라는 졸업논문과 함께 대학을 졸업했으나, 아버지가 사망함에 따라 학자금과 생계유지를 위해 수년에 걸쳐 지방 귀족 가문의 가정교사 생활을 하면서 홀로 철학 연구를 계속했다고 한다.
2. 2. 대학 졸업과 교수 생활
1740년, 16세의 나이로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에 입학한 칸트는 마르틴 크누첸(Martin Knutzen)에게서 철학과 수학, 논리학을 배웠다. 특히 아이작 뉴턴의 물리학에 매료되었다.[261]후대 전기 작가들의 기록에 따르면, 1746년 《활력의 진정한 측정에 관한 사상》이라는 졸업 논문을 제출하고 대학을 졸업했으나,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학자금과 생계 유지를 위해 지방 귀족 가문의 가정교사 생활을 하며 홀로 철학 연구를 계속했다고 한다. 그러나 칸트는 곧 대학으로 돌아왔으며, 1755년 6월 12일, 《일반자연사와 천체이론》이라는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동시에 《형이상학적 인식의 으뜸가는 명제의 새로운 해명》이라는 논문으로 대학에서 강의할 자격을 얻었다. 이후 대학에서 일반논리학, 물리학, 자연법, 자연신학, 윤리학 등 여러 주제로 강의했다.
1756년, 스승인 크누첸이 사망하자 칸트는 그의 후임으로 교수직을 얻으려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764년 프로이센 교육부에서 제안한 문학 교수 자리를 거절할 정도로 철학 교수직을 원했다. 18세기까지도 수학과 물리학은 자연철학으로 간주되어 철학의 영역에 속했다. 1766년에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왕립도서관 사서로 취직하여 1772년까지 근무했다. 그 사이 칸트는 쾨니히스베르크 대학 철학 교수직을 얻었으며, 이때 발표한 교수 취임 논문(1770년)은 칸트 비판철학의 시작을 알리는 저술로 평가받고 있다.
2. 3. 말년과 죽음
칸트는 평생 쾨니히스베르크를 떠나지 않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며 강의와 사유에 전념했다.[262] 1792년, 논문 출판과 검열 문제로 학부 관리처와 갈등을 겪었다. 문제가 된 논문 《인간 본성의 근본악에 관하여》는 당시 계몽주의 사상과 종교에 대한 칸트의 솔직한 견해를 담고 있었고, 대학 관리처는 이에 경고를 보냈다.1792년, 칸트는 『순수이성의 범주 내에서의 종교』의 두 번째 글을 「베를린 월간지」에 게재하려 했으나,[39] 프랑스 혁명과 함께 설립된 국왕 검열 위원회의 반대에 부딪혔다.[40] 칸트는 신학적 검열을 피하고자 예나 대학교 철학과를 통해 네 편의 글을 모두 책으로 출판했다.[40] 이는 국왕의 질책을 야기했고,[40] 1794년 두 번째 판 출판 후, 검열관은 칸트에게 종교 관련 출판 및 발언 금지 왕명을 내렸다.[40] 칸트는 국왕의 질책에 대한 답변을 출판하고 『능력의 갈등』 서문에서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40]
평생 독신으로 커피와 담배를 즐겼던 칸트는 1804년 2월 12일 새벽 4시, 8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마지막으로 “그것으로 좋다(Es ist gut)”라는 말을 남겼다.[262]
칸트는 규칙적인 생활 습관으로 유명했다. 새벽 기상 후 연구, 오전에는 대학 강의 등 공무를 수행하고, 귀가 후에는 정해진 길을 정해진 시간에 산책했다. 그의 산책 시간은 매우 정확하여, 이웃들은 칸트의 모습을 보고 시계 오차를 확인했다고 한다.
어느 날, 칸트가 평소 산책 시간에 나타나지 않자 주변 사람들은 걱정했다. 그날 칸트는 루소의 에밀에 몰두하여 산책을 잊었던 것이다. 칸트는 루소에 대해, 『미와 숭고의 감정에 관한 관찰』의 『각서』에서 "루소가 나의 잘못을 바로잡아 주었다. 눈을 멀게 하는 우월감은 사라지고, 나는 인간을 존중하는 법을 배운다"라고 말했다.[218]
3. 칸트 철학
칸트는 18세기 철학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평가받는다. 칸트 이전과 이후의 철학은 차이를 보이는데, 이는 칸트가 기존의 형이상학과 다른 '학문으로서의 형이상학' 체계를 세우려 했기 때문이다. 그는 인식론을 연구하여 합리주의와 경험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두 사상의 한계를 극복하려 했다. 칸트의 '학문으로서의 형이상학'은 인식론에 기반을 두고 이성이 스스로를 비판하는 철학이다.[263]
칸트는 1787년 『순수이성비판』 2판을 출판하면서 앞부분을 대대적으로 수정했다. 이후 그는 철학의 다른 영역, 특히 도덕철학에 집중하여 1788년 『실천이성비판』과 1797년 『도덕형이상학』을 발표했다. 1790년 『판단력비판』에서는 칸트 체계를 미학과 목적론에 적용했다. 1792년, 칸트는 『순수이성의 범주 내에서의 종교』 네 편 중 두 번째 편을 출판하려 했으나 검열 위원회의 반대에 부딪혔다.[39]
그는 역사, 종교, 정치 등에 대한 여러 수필을 저술하여 18세기 철학에서 그의 지위를 확고히 했다. 칸트 철학을 옹호하고 비판하는 여러 저널이 있었지만, 칸트의 제자들은 그의 입장을 변형시켜 독일 관념론의 출현을 알렸다. 칸트는 1799년 공개 서한에서 피히테를 비난했다.[41]
1800년, 칸트의 제자 고틀로브 베냐민 예슈는 칸트의 요청에 따라 논리학 교재인 『논리학(Logik)』을 출판했다. 『논리학』은 칸트 철학의 이해에 있어 중요한 것으로 여겨져 왔다.[42]
칸트는 형이상학의 기본 개념을 "이데아"라고 불렀다. "초월적 환상"은 이성이 그러한 이데아를 생성하는 경향에 대한 칸트의 용어이다. 가능한 경험의 한계를 고려하지 않고 추구되는 세 가지 관계 범주는 전통적 형이상학의 세 가지 중심 이데아를 산출한다.
# 영혼: 궁극적 주어로서의 실체 개념
# 전체로서의 세계: 완성된 연쇄로서의 인과 관계 개념
# 신: 모든 가능성의 공통 기반으로서의 공동체 개념
칸트는 이러한 이데아가 진정한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보았지만, 인식을 체계적인 전체로 통합하려는 이성의 고유한 추동의 결과라고 주장한다.
칸트는 인간 본성에 대한 연구인 인류학(Anthropology)을 23년 동안 강의했다.[142] 그의 저서 『실용적 관점에서 본 인류학』은 1798년에 출판되었다. 칸트는 인류학을 지적 연구 분야로 소개한 최초의 인물 중 한 명이었으며, 그의 관점은 마르틴 하이데거와 폴 리쾨르와 같은 후대 철학자들의 작품에 영향을 미쳤다.[144]
칸트는 인간 다양성에 대한 차원 접근 방식을 최초로 제안한 사람이었다. 그는 히포크라테스-갈레노스의 4체액설의 본질을 분석하고 "인간의 욕구 능력에 속하는 것"인 "자연적인 적성 또는 자연적인 성향"과 "기질 또는 감수성"이라는 두 가지 차원을 도표에 나타냈다.[145]
칸트의 인종 이론과 편견은 최근 칸트 연구에서 가장 논쟁적인 영역 중 하나이다.[147][148] 그의 저서에 나타나는 인종차별주의를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그것이 그의 다른 업적을 얼마나 떨어뜨리는가 하는 점은 논쟁적이다.
칸트는 인종차별주의를 옹호한 주목할 만한 계몽주의 사상가 중 한 명이었다. 철학자 찰스 W. 밀스는 칸트가 현대 '과학적인' 인종차별주의의 탄생에 있어 중심인물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고 말한다.[153]
고대 그리스의 4체액설을 사용하여 칸트는 백인 유럽인, 흑인 아프리카인, 적색 인디언을 포함한 인종 범주의 계층을 제안했다.[153] 그는 오랫동안 과학적 인종차별주의의 지지자였지만, 칸트의 인종에 대한 견해는 생애 마지막 10년 동안 상당히 변화했고, 그는 궁극적으로 『평화론: 철학적 개요』(1795)에서 인종 계층과 유럽 식민주의를 거부했다.
칸트의 사상은 서구 사상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칸트의 관념론은 현대 과학과 논리에 의해 반증되었다는 주장이 있으며,[157][158][159] 현대 철학자들의 지적 어젠다를 설정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19세기 초까지 철학적 탐구 방식에 혁신을 가져왔다는 공로를 인정받는다.
칸트의 사상은 독일 관념론,[162] 마르크시즘,[163] 실증주의,[164] 현상학,[165] 실존주의,[166] 비판 이론,[167] 언어 철학,[168] 구조주의,[169] 탈구조주의,[170] 그리고 해체주의[171]를 포함한 다양한 사상 학파에 통합되었다.
칸트 사후 그의 사상은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는 1780년대와 1790년대에 카를 레온하르트 라인홀트, 요한 고틀리브 피히테, 프리드리히 빌헬름 요제프 폰 셸링,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노발리스에게 영향을 미쳤다.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는 칸트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신칸트주의로 알려진 칸트의 이론적 철학의 중요한 부흥이 이어졌다. 칸트의 "비판" 개념은 더 광범위하게 영향력을 행사했다.
칸트는 수학적 진리가 종합적 선험적 지식의 형태라고 믿었는데, 이는 그것들이 필요하고 보편적이지만, 경험의 초월적 전제 조건으로서 공간과 시간의 선험적 직관을 통해 알려진다는 것을 의미한다.[178] 칸트의 수학에 대한 발언은 직관주의로 알려진 수학 학교에 영향을 미쳤다.
칸트의 『영구평화론』은 민주평화론의 많은 아이디어들을 예견한 것으로 여겨진다.[179]
최근 주목받는 칸트주의자들로는 영국의 철학자 P. F. 스트로손, 오노라 오닐,[181] 카심 카샘,[182] 미국의 철학자 윌프리드 셀라스,[183] 크리스틴 코르스가르드가 있다.
유르겐 하버마스와 존 롤스는 칸트의 도덕 철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두 명의 중요한 정치 및 도덕 철학자이다. 그들은 상대주의에 반대하여[184] 어떤 실행 가능한 도덕 철학에도 보편성이 필수적이라는 칸트의 견해를 지지했다.
칸트의 영향은 막스 베버의 사회학, 장 피아제의 심리학, 칼 구스타프 융과 같이 사회 과학, 행동 과학, 자연 과학으로 확장되었다.[187][188] 칸트의 수학과 종합적 선험적 지식에 대한 연구는 이론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그의 지적 발전에 대한 초기 영향으로 인용했지만, 나중에 비판하고 거부한 영향이었다.[189]
3. 1. 인식론
칸트의 철학은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이라는 세 가지 주요 저서를 통해 '비판철학'이라고 불린다. 칸트는 뉴턴의 자연과학, 루소의 철학, 흄의 회의론을 받아들여 자신의 철학을 발전시켰다.[268]《순수이성비판》(1781년)은 "나는 무엇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답하며 인식론을 다룬다.[264] 17~18세기 철학의 인식론은 합리주의와 경험주의로 나뉘었는데, 칸트는 이 두 사상을 통합하여 선험주의를 주장했다. 그는 지식의 보편성과 필연성을 인정하면서도 인식을 확장하는 '선험적(선천적: a priori) 종합판단'을 긍정했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인간 이성의 한계를 지적하며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시도했다. 이는 인간이 대상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인식이 대상의 관념을 만들어낸다는 생각이다.[268]
칸트의 인식론은 감성을 통해 얻은 감각을 범주를 사용하여 지성(Verstand: 오성)으로 인식하고, 초경험적인 것은 이성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감성과 지성은 인간이 지각하는 데 필수적인 요건이며, 시간과 공간 값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초경험적인 것을 이성으로 알려고 하는 것을 비판하고, 형이상학적인 사상들을 배격하고자 했다. 그는 형이상학의 영역이 거짓이 아니라,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인간의 지성은 사물의 현상을 분류, 정리할 수 있지만, 그 현상 너머의 본질(물자체)에는 이를 수 없다고 보았다.[264] 칸트는 형이상학이 이성의 인식체계에 대한 학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263]

46세의 칸트는 데이비드 흄에게 "독단적 잠에서" 깨어나게 해 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했다.[30][31] 흄은 ''인간 본성에 관한 논문''에서 인과율, 도덕성, 대상과 같은 개념의 실재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칸트는 이성이 이러한 회의론을 제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칸트는 코페르니쿠스 혁명과 유사하게 세상의 대상은 ''선험적으로'' 직관될 수 있으며, 따라서 직관은 객관적 현실과 구별된다고 제안했다.[33]

''순수이성비판'' 초판은 복잡한 스타일로 인해 큰 반응을 얻지 못했다.[34] 칸트는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 등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35] 원 논문을 명확히 할 필요성을 느낀 칸트는 1783년에 ''미래 형이상학을 위한 서설''을 썼다.
칸트의 명성은 1780년대 후반, "계몽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1784), ''도덕형이상학의 기초''(1785), ''자연과학의 형이상학적 기초''(1786) 등의 작품을 통해 높아졌다. 카를 레온하르트 라인홀트는 칸트 철학을 범신론 논쟁에 대한 반응으로 묘사하며 칸트를 당대 가장 유명한 철학자로 만들었다.[38]
칸트는 1787년에 『순수이성비판』의 두 번째 판을 출판했다. 그는 1790년 『판단력비판』에서 칸트 체계를 미학과 목적론에 적용했다. 1792년, 칸트는 『순수이성의 범주 내에서의 종교』 네 편 중 두 번째 편을 출판하려 했으나 검열 위원회의 반대에 부딪혔다.[39]
칸트는 역사, 종교, 정치 등에 대한 여러 수필을 저술하여 18세기 철학에서 그의 지위를 확고히 했다. 칸트 철학을 옹호하고 비판하는 여러 저널이 있었지만, 칸트의 제자들은 칸트의 입장을 변형시켜 독일 관념론의 출현을 알렸다. 칸트는 1799년 공개 서한에서 피히테를 비난했다.[41]
1800년, 칸트의 제자 고틀로브 베냐민 예슈는 칸트의 요청에 따라 논리학 교재인 『논리학(Logik)』을 출판했다. 『논리학』은 칸트 철학의 이해에 있어 중요한 것으로 여겨져 왔다.[42]
칸트는 형이상학의 기본 개념을 "이데아"라고 부른다. "초월적 환상"은 이성이 그러한 이데아를 생성하는 경향에 대한 칸트의 용어이다. 가능한 경험의 한계를 고려하지 않고 추구되는 세 가지 관계 범주는 전통적 형이상학의 세 가지 중심 이데아를 산출한다.
# 영혼: 궁극적 주어로서의 실체 개념
# 전체로서의 세계: 완성된 연쇄로서의 인과 관계 개념
# 신: 모든 가능성의 공통 기반으로서의 공동체 개념
칸트는 순수 이성의 관념이 우리의 이론적 및 실천적 탐구를 지시하고 구성하는 데 중요한 ''규제적'' 기능을 한다고 주장한다.
「비판(Kritik)」은 인간의 인식 능력의 한계와 능력을 확정하고, 각각에 알맞은 역할을 규정하는 시도이다. 『순수이성비판』에서는 인간의 인식이 감성과 지성의 협동에 의해서만 가능하며, 경험적 인식에서 순수 이성은 통제적 사용에만 그 사용이 제한된다.
칸트에 따르면, 인간의 인식능력은 감성과 지성의 두 가지 원천으로부터 나온다. 순수 지성 개념은 시간에 제한되는 도식(schema)에 의해서만 감성과 관계한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인식 원천의 협동에 의해서만 대상을 인식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에게 "직관"으로 주어질 수 없는 이성 개념은 우리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이성 추리에 의한 관념은 이른바 절대자에까지 확장된 순수 지성 개념이다. 신 또는 초월자가 그 대표적인 예이며, 이것을 칸트는 물자체(Ding[e] an sich selbst)라고 부른다.
『프롤레고메나』에 따르면, 순수 지성 개념은 현상을 경험으로 읽을 수 있도록 글자로 나타내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며, 만약 물자체와 관련지어야 할 것이라면 무의미하게 된다.
3. 2. 윤리학
칸트는 윤리학을 연구하면서 주관적인 감정이나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도덕이 아니라, 모두가 인정할 수 있는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도덕을 추구했다. 모두가 합리적이고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도덕을 지키는 것이 옳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도덕을 도덕법칙이라고 부르는데, 칸트는 인간이 자신의 감정에 따라 선을 베푸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보았다. 그는 인간의 마음 속에서 충동과 도덕이 투쟁하며, 도덕이 이기면 선한 행동을 하고 충동이 이기면 그른 일을 하게 된다고 보았다. 하지만 도덕이 충동을 완전히 없애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칸트는 행위의 결과보다 행위의 동기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는 어떤 결과를 얻거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명령이 아니라, 명령 그 자체가 목적인 무조건적인 명령을 도덕법칙으로 제시했다. 즉, 때와 장소에 따라 달라지는 조건적인 가언명령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무조건 따라야 하는 의무로서의 명령인 정언명령을 강조했다.[271]
칸트에 따르면, 누구나 어떤 조건에서든 따라야 하는 정언명령은 두 가지이다.
첫째, "네 의지의 준칙(격률)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될 수 있도록 행위하라"이다.[271] 이는 쉽게 말해, 어떤 행동을 할 때 다른 모든 사람이 그와 같은 행동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되는 행동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둘째, "너 자신과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을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도록 행위하라"이다.[271] 칸트는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인간이 자연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는 자연론적인 인간관을 반대했다. 그는 모든 인간의 평등한 존엄성을 강조하며, 인간은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 인격체로서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며, 존엄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271]
칸트는 그의 윤리학, 즉 도덕철학을 『도덕형이상학 기초』(1785), 『실천이성비판』(1788), 그리고 『도덕형이상학』(1797) 세 권의 저서에서 발전시켰다.
칸트는 도덕과 관련하여 선의 근원은 자연이나 신에 의해 주어지는 것과 같이 인간 주체 외부의 어떤 것에도 있지 않고 오직 선의 자체에만 있다고 주장했다. 선의란 자율적인 인간이 스스로에게 자유롭게 부여하는 보편적인 도덕 법칙에 따라 의무에서 비롯된 행동을 하는 것이다. 이 법칙은 인간(이성적 행위자로 이해되고 자신과 타인을 통해 표현됨)을 목적 그 자체로 다루도록 요구하며, 개인이 가질 수 있는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만 다루는 것을 금한다. 칸트는 모든 도덕적 의무가 의무의 개념에서 파생되는 "정언명령"에 근거한다는 이론으로 유명하다. 그는 도덕 법칙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 것과 같은 세상에 대한 우연적인 사실에 근거하지 않고 이성 자체의 원리라고 주장한다. 도덕 법칙에 따르는 행위는 "행복할 자격" 외에 다른 동기가 없다.[83]
칸트는 정언명령과 가정명령을 구분한다. '가정적' 명령은 우리가 우연적인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따라야 하는 명령이다. 반면 '정언적' 명령은 우리의 욕망과 무관하게 우리를 구속한다. 예를 들어, 모든 사람은 상황에 관계없이, 때로는 이기적인 이익에 반하더라도, 개인을 목적으로 존중해야 할 의무를 지닌다. 이러한 명령은 행위자에 대한 우연적인 사실이 아니라, 그 명령의 정언적 형식 때문에 도덕적으로 구속력을 갖는다.[88]
칸트는 정언명령에 대한 세 가지 공식을 제시한다. 그는 이것들이 도덕 법칙 자체의 순수한 보편성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동등하다고 주장했지만,[89] 많은 학자들은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90] 그 공식들은 다음과 같다.
- 보편화 가능성의 원칙:
- *"오직 그러한 격률에 따라서만 행위하라. 곧 동시에 너 자신이 그것이 보편적 법칙이 되기를 의지할 수 있는 그러한 격률에 따라서만 행위하라";[91] 또는,
*자연법칙 공식**: "마치 네 행위의 격률이 네 의지에 의해 보편적 자연법칙이 될 것처럼 행위하라".[91]
- 목적 자체로서의 인간성 공식:
- *"너 자신 안에서든 다른 사람 안에서든 인간성을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 사용하고, 단순한 수단으로만 사용하지 마라".[92]
- 자율성 공식:
- *"모든 합리적 존재의 의지를 보편적 법칙을 제정하는 의지로서 생각하는 것", 또는 "자신의 선택의 격률이 동시에 보편적 법칙으로서 동일한 의지 안에 포함되도록 다르게 선택하지 않는 것";[94] 또는,
*목적의 왕국 공식**: "단순히 가능한 목적의 왕국을 위한 보편적 입법자의 격률에 따라 행위하라".[95][96]
칸트는 '격률'을 "주관적 의지의 원리"로 정의하며, 이는 "객관적 원리 또는 '실천적 법칙'"과 구분된다.[97] 후자는 모든 합리적 존재에게 유효하며, '그들이 행위해야 하는 원리'이지만, 격률은 '이성이 주체의 조건(종종 그들의 무지나 기호)에 따라 결정하는 실천적 규칙을 포함하며, 따라서 주체가 행위하는 원리'이다.
보편화되었을 때 개념상 또는 의지상의 모순을 초래하는 격률은 실천적 법칙으로서 자격을 갖추지 못한다. 개념상의 모순은 격률이 보편화될 경우, "그 격률은 보편적 법칙이 되는 즉시 스스로를 파괴할 것"이기 때문에 의미가 없어질 때 발생한다.[98] 예를 들어, '약속을 어기는 것이 허용된다'는 격률이 보편화된다면, 아무도 어떤 약속도 신뢰하지 않을 것이므로, 약속이라는 개념 자체가 무의미해질 것이다. 그 격률은 논리적으로 보편화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즉 우리는 이 격률이 보편화된 세계를 상상할 수 없기 때문에 도덕적이지 않다.[99] 어떤 격률은 보편화될 때 의지상의 모순을 만들어내는 경우에도 비도덕적일 수 있다. 이것은 논리적 모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격률을 보편화하는 것이 어떤 합리적 존재도 원하지 않는 상황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칸트가 1785년에 저술한 『도덕형이상학 기초정립』에서 설명하고 그 제목이 직접적으로 나타내듯이, 그 책은 "도덕의 최고 원리에 대한 탐구와 확립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100]
3. 3. 미학
칸트는 1790년 저서 『판단력 비판』에서 미학 이론을 발전시켰으며, 여기서 "미적 판단"의 가능성과 논리적 지위를 조사했다. 『판단력 비판』의 첫 번째 주요 부분인 "미적 판단 비판"에서 칸트는 현대적 의미와 유사한 방식으로 "미적"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126] 『순수이성비판』에서 칸트는 미적 판단, 도덕적 판단, 과학적 판단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점을 지적하기 위해 "미적"이라는 용어를 "미각 비판을 지칭하는" 용어로 버리고, 미적 판단은 결코 "선험적 법칙"에 의해 "지시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127] A. G. 바움가르텐 이후,[128] 칸트는 미학 이론을 통합적이고 포괄적인 철학 체계에 통합하고 발전시킨 최초의 철학자 중 한 명이었다.[128]칸트는 『판단력 비판』의 "아름다움 분석" 장에서 아름다움이 예술 작품이나 자연 현상의 속성이 아니라, 상상력과 이해력의 '자유로운 작용'에 수반되는 즐거움에 대한 의식이라고 주장한다. 이성을 사용하여 무엇이 아름다운지 결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판단은 인식적 판단이 아니며,[129] "따라서 논리적인 것이 아니라 미적인 것"이다.[129]
순수한 미적 판단은 주관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체의 감정적 반응을 나타내고 대상 자체에 대한 존중 이외에는 아무것도 근거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관심한 즐거움이며, 우리는 순수한 미적 판단(즉, 아름다움에 대한 판단)이 보편적 타당성을 주장한다고 느낀다.[130] 이러한 보편적 타당성은 아름다움에 대한 결정적인 개념에서 유래하는 것이 아니라 ''상식''에서 유래한다.[131] 칸트는 또한 미적 판단이 도덕적 판단과 특징을 공유한다고 믿었다. 둘 다 무관심하며, 우리는 그것들을 보편적이라고 여긴다.
칸트는 "숭고 분석" 장에서 숭고를 아름다움과 마찬가지로 주관적인 미적 특성으로 확인하지만, 아름다움과 달리 상상력과 이성의 능력 사이의 불확정적인 관계를 나타낸다고 보았다. 또한 이성과의 연관성에서 도덕적 판단의 성격을 공유한다.[133] 숭고의 감정은 두 가지 방식(수학적 숭고와 역동적 숭고)으로 나뉜다.[134] 일부 해설자들은 칸트의 비판 철학에 도덕적 숭고가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도덕 법칙이나 표상에 대한 미적 반응이며, 칸트의 1764년 이론에서 "고귀한" 숭고의 발전이다.[135]
수학적 숭고는 상상력이 경계가 없고 형태가 없는, 또는 "절대적으로 큰" 자연물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136] 이러한 상상력의 실패는 이성이 무한의 개념을 주장하는 데서 얻는 즐거움을 통해 회복된다. 이러한 움직임에서 이성의 능력은 우리의 오류가 많은 감각적인 자아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한다.[137] 역동적 숭고에서는 상상력이 광대한 힘을 이해하려고 할 때 감각적인 자아가 소멸되는 느낌이 있다. 자연의 이러한 힘은 우리를 위협하지만, 그러한 감각적 소멸에 대한 이성의 저항을 통해 주체는 즐거움과 인간의 도덕적 소명의식을 느낀다. 숭고에 노출됨으로써 도덕적 감정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도덕적 성격을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칸트는 유머 이론을 발전시켰는데,[138] 이는 "부조화" 이론으로 해석되어 왔다. 그는 『판단력 비판』에서 세 가지 이야기 형식의 농담을 들려줌으로써 그의 유머 이론을 설명했다. 그는 유머의 생리적 영향이 음악의 영향과 유사하다고 생각했다.[139]
칸트는 1784년 저서 『우주적 목적을 지닌 세계사 이념』에서 사회의 관습에 종속되는 물질적 가치로서의 예술 대상과 미적 판단의 초월적 조건으로서의 "세련된" 가치 사이의 구분을 발전시켰다. 그 저서의 제4 및 제5 논제에서 그는 모든 예술을 인간의 "사회적 적대감"으로 인한 "비사교성의 산물"로 확인했고,[140] 제7 논제에서는 그러한 물질적 재산이 문명화된 상태를 나타내는 반면, 정신의 향상을 통한 도덕성의 이상과 세련된 가치의 보편화만이 "문화에 속한다"고 주장했다.[141]
3. 4. 역사 철학 및 정치 철학
칸트는 영구평화론에서 전쟁을 종식시키고 지속적인 평화를 이룩하는 데 필요하다고 생각한 몇 가지 조건을 열거했는데, 여기에는 헌법 공화국으로 이루어진 세계가 포함된다.[103] 칸트는 보편사가 궁극적으로 평화로운 공화국의 세계로 이어진다고 믿었지만, 그의 이론은 실용적이지 않았다. 영구평화론에서 이 과정은 합리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것으로 묘사되었다.칸트의 정치 사상은 공화 정부와 국제 기구로 요약될 수 있다. "칸트적인 용어로 더욱 특징적으로 표현하면, 그것은 법에 기반한 국가 이론 (''Rechtsstaat'')과 영원한 평화의 이론이다. 실제로 이러한 공식 각각에서 두 용어는 모두 같은 개념, 즉 법적 구성 또는 '법을 통한 평화'를 표현한다.[106]" 칸트의 정치철학은 본질적으로 법적 교리이기 때문에, 도덕적 교육과 열정의 작용을 사회생활의 대안적 기반으로 하는 대립을 정의에 의해 거부한다. 국가는 법 아래의 인간의 연합으로 정의된다. 정당하게 국가라고 불리는 것은 법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선험적으로 필요한 법에 의해 구성된다. 그러한 체제는 다른 기준으로 판단되거나 법적 질서 자체에 고유한 것 이외의 다른 기능이 할당될 수 없다.[107]
칸트는 그의 시대에 직접민주주의를 의미했던 "민주주의"에 반대하여, 다수결이 개인의 자유를 위협한다고 믿었다. 그는 "엄격한 의미에서의 ''민주주의''는 반드시 ''전제 정치''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사람이 한 사람을 위해, 필요하다면 한 사람에 반하여 결정하는 집행 권력을 수립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동의하지 않는 사람). 따라서 모든 사람이 아닌 모든 사람이 결정하며, 이것은 일반 의지와 자체, 그리고 자유에 대한 모순입니다."라고 하였다.[108]
당시 대부분의 저술가들과 마찬가지로, 칸트는 세 가지 형태의 정부, 즉 민주주의, 귀족 정치, 군주제를 구분했으며, 혼합 정부를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 보았다.[109] 그는 공화국의 이상과 통치 형태, 그리고 그것에 의해 가져온 법치주의를 믿었다.[110] 칸트는 이것을 "대중적인 글"로 출판했지만, 메리 J. 그레고르는 2년 후 '''도덕형이상학'''에서 칸트가 "보편적이고 지속적인 평화를 수립하는 것은 단순히 권리 교리의 일부가 아니라 오히려 순수 이성의 한계 내에서 권리 교리의 전체 최종 목표를 구성한다"는 것을 ''체계적으로'' 증명한다고 주장한다는 점을 지적한다.[111][112]
1797년에 출판된 '''권리론'''에는 칸트의 정치철학에 대한 가장 성숙하고 체계적인 기여가 담겨 있다. 그것은 법에 따른 의무, 즉 "개인의 외부 자유를 보호하는 것만을 다루고" 동기에 무관심한 의무를 다룬다. "우리가 올바른 행동으로 스스로를 제한할 도덕적 의무가 있지만, 그 의무는 [권리] 자체의 일부가 아닙니다." 그의 기본적인 정치적 아이디어는 "각 개인이 자신의 주인이 될 권리는 공공 법적 제도가 마련되어 있는 경우에만 다른 사람들의 권리와 일치합니다."이다.[113]
칸트는 인류의 역사를 인간이 자신의 자연적 소질을 실현하는 과정으로 보았다. 인간에게 있어 자연적 소질이란 본능이 아니라 이성에 의해 행복과 완벽을 추구하는 것이다.
4. 영향과 비판
칸트의 사상은 당대와 후대에 걸쳐 많은 영향을 주었지만, 동시에 다양한 비판을 받았다.
칸트는 뉴턴 등의 과학적 발전에 큰 감명을 받았으며, 인간 이성의 힘에 대한 새로운 증거는 많은 사람들에게 정치와 종교의 전통적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게 만들었다고 보았다. 특히, 근대적 기계론적 세계관은 자유 의지가 없다면 책임 또한 존재할 수 없다는 점에서 도덕성의 가능성 자체에 의문을 제기했다.[55]
칸트의 비판철학은 기계론으로부터 종교와 도덕성의 기반인 인간의 자율성을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순수이성비판》에서 칸트는 자신의 철학적 관심사를 다음 세 가지 질문으로 요약했다.
#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 나는 무엇을 바랄 수 있는가?[56]
《순수이성비판》은 첫 번째 질문에 초점을 맞추면서,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을 위한 개념적 공간을 열었다. 칸트는 우리가 자유로운 존재로 '생각'할 수 있으며, 실제적인 목적을 위해서는 그렇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믿음을 위한 공간을 만들기 위해 지식을 부정해야만 했다."[57]고 말했다.
칸트는 인종차별주의를 옹호한 가장 주목할 만한 계몽주의 사상가 중 한 명이었다. 철학자 찰스 W. 밀스(Charles W. Mills)는 칸트가 현대 '과학적인' 인종차별주의의 탄생에 있어 중심 인물 중 한 명이라고 주장한다. 칸트는 4체액설을 사용하여 백인 유럽인, 흑인 아프리카인, 적색 인디언을 포함한 인종 범주의 계층을 제안했다.[153] 칸트는 혼혈결혼 반대자였으며, 반유대주의자였다.[154]
밀스는 칸트의 인종차별적인 작품들이 무시되었다고 비판한다. 로버트 베르나스코니(Robert Bernasconi)는 칸트가 "인종에 대한 최초의 과학적 정의를 제공했다"고 말했다. 에마누엘 추크우디 에제(Emmanuel Chukwudi Eze)는 칸트의 인종차별주의에 대한 기여를 알린 공로가 있다. 폴린 클라인겔드(Pauline Kleingeld)는 칸트가 『평화론』(1795)에서 인종 계층과 비백인의 감소된 권리 또는 도덕적 지위와 관련된 과거의 견해를 거부했다고 주장한다.
4. 1. 영향
칸트의 영향력은 서양 사상 전반에 걸쳐 광범위하게 나타난다.[272] 칸트는 철학의 틀을 바꾸어 놓았으며, 그의 사상은 공리주의부터 후기 칸트 학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미쳤다.칸트의 사상은 독일 관념론, 실증주의, 현상학, 실존주의, 비판 이론, 언어 철학, 구조주의, 후기 구조주의, 해체주의 등 다양한 학파에 영향을 미쳤다.[162][163][164][165][166][167][168][169][170][171] 또한 막스 베버의 사회학, 장 피아제의 심리학, 노암 촘스키의 언어학 등 사회과학 및 행동과학에도 영향을 주었다.[187][188]
칸트의 생애 동안, 그의 사상은 1780년대에서 1790년대까지 라인홀트, 피히테, 셸링, 헤겔, 노발리스에게 영향을 주었다. 칸트의 이론적, 실천적 글쓰기에 영향을 받아 일어난 철학 운동은 독일 관념론으로 알려졌다.[274]
칸트는 수학적 진리가 종합적 선험적 지식의 형태라고 보았으며, 이는 직관주의 수학 학파에 영향을 미쳤다.[178] 그의 『영구 평화론』은 민주평화론의 많은 아이디어를 예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179]
최근 주목받는 칸트주의자로는 영국의 철학자 P. F. 스트로손,[181] 오노라 오닐,[182] 카심 카샘, 그리고 미국의 철학자 윌프리드 셀라스,[183] 크리스틴 코르스가르드 등이 있다.
유르겐 하버마스와 존 롤스는 칸트의 도덕 철학에 큰 영향을 받은 정치 및 도덕 철학자이다.[184] 무종산은 칸트 연구를 통해 신유교를 발전시켰으며, 중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칸트 학자로 꼽힌다.[185][186]



4. 2. 비판
칸트의 철학은 당대에 많은 비판과 반발을 샀다. 칸트는 이성과 종교 모두를 비판했는데, 이는 당시 이성을 신뢰하던 철학자나 종교를 믿던 종교인 모두에게 매우 불만스러운 것이었다.[275]뉴턴 등의 과학적 발전에 큰 감명을 받은 칸트는 인간 이성의 힘에 대한 새로운 증거는 많은 사람들에게 정치와 종교의 전통적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게 만들었다고 보았다. 특히, 근대적 기계론적 세계관은 도덕성의 가능성 자체에 의문을 제기했는데, 만약 자유 의지가 없다면 책임 또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55]
칸트의 비판철학은 기계론으로부터 종교와 도덕성의 기반인 인간의 자율성을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순수이성비판》에서 칸트는 자신의 철학적 관심사를 다음 세 가지 질문으로 요약했다.
#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 나는 무엇을 바랄 수 있는가?[56]
《순수이성비판》은 첫 번째 질문에 초점을 맞추면서,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을 위한 개념적 공간을 열었다. 칸트는 우리가 자유로운 존재로 '생각'할 수 있으며, 실제적인 목적을 위해서는 그렇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칸트는 "믿음을 위한 공간을 만들기 위해 지식을 부정해야만 했다."[57]고 말했다.
'''순수이성비판'''의 「원리분석」에서 칸트는 범주가 실제 경험에 보편적으로 적용되어야 함을 보여주고자 했다. 이 절의 「도식」에서 칸트는 이해의 순수 논리적 범주 각각을 직관의 시간성과 연결하여 비경험적이지만 경험 대상에 대한 영향력을 지닌다는 것을 보여준다.
「경험의 유비」는 "수리적" 원리에서 "역동적" 원리, 즉 대상 간의 관계를 다루는 원리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유비는 세 가지가 있다.
# '''실체의 지속 원리''': 시간의 통일성은 "모든 변화는 존재와 양이 불변하거나 보존되어야 하는 기저 실체의 상태 변화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78]
# '''인과율에 따른 시간적 계승 원리''': "주관적인 표상의 계승과 대조적으로 사건의 객관적인 계승에 대해 결정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것은 모든 객관적인 변화가 필연적인 계승 규칙 또는 인과 법칙을 따를 때뿐이다"라는 것이다. 이것은 휴머니즘의 인과율에 대한 회의론에 대한 칸트의 가장 직접적인 반박이다.[79]
# '''상호성 또는 공동체의 법칙에 따른 동시성 원리''': "공간의 다른 영역에 있는 대상(또는 실체의 상태)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결정적인 판단은 그러한 대상이 공동체 또는 상호 작용의 상호 인과 관계에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모나돌로지'''에서 라이프니츠의 논제에 대한 칸트의 반박이다.[80]
「원리분석」의 마지막 장은 우리가 진정한 지식을 가질 수 있는 '''현상'''과 우리가 알 수는 없지만 여전히 "부정적인 의미"로 언급할 수 있는 순수 사유의 대상을 가리키는 '''물자체'''를 구분한다.
칸트는 인종차별주의를 옹호한 가장 주목할 만한 계몽주의 사상가 중 한 명이었다. 철학자 찰스 W. 밀스(Charles W. Mills)는 칸트가 현대 '과학적인' 인종차별주의의 탄생에 있어 중심 인물 중 한 명이라고 주장한다. 칸트는 4체액설을 사용하여 백인 유럽인, 흑인 아프리카인, 적색 인디언을 포함한 인종 범주의 계층을 제안했다.[153] 칸트는 혼혈결혼 반대자였으며, 반유대주의자였다.[154]
밀스는 칸트의 인종차별적인 작품들이 무시되었다고 비판한다. 로버트 베르나스코니(Robert Bernasconi)는 칸트가 "인종에 대한 최초의 과학적 정의를 제공했다"고 말했다. 에마누엘 추크우디 에제(Emmanuel Chukwudi Eze)는 칸트의 인종차별주의에 대한 기여를 알린 공로가 있다. 폴린 클라인겔드(Pauline Kleingeld)는 칸트가 『평화론』(1795)에서 인종 계층과 비백인의 감소된 권리 또는 도덕적 지위와 관련된 과거의 견해를 거부했다고 주장한다.
칸트의 『영구평화를 위하여』는 민주평화론의 많은 아이디어들을 예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179]
5. 주요 저서
(1787년, 2판)
백종현 옮김(전2권), 아카넷, 2006년
이원봉 옮김, 책세상, 2002년
최재희 옮김, 박영사, 2011년
백종현 옮김, 아카넷, 2009년